밥죤스 신학교의 역사
일본에서 18년간 선교 사역을 한 후에 1967년 제랄드 죤슨 박사(Dr. Gerald Johnson)는 하나님께서 한국으로 가라고 부르심을 느꼈다.
한국에 도착한 후 그는 한국복음동지선교회(Korea Gospel Fellowship Missions)를 세우고, 전국적으로 전도지 보급과 통신강좌를 시작했다. 한국은 복음과 교육에 목말라 있었다. 전도지 보급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전국에 있는 수많은 목회자들로부터 전도지 요청이 쇄도했다. 모든 전도지는 무료로 보급되었고 단 한 장도 돈을 받고 팔지 않았다. 수백만 장의 전도지가 보급되었고, 수천명이 통신강좌를 수강했다. 한국복음동지선교회는 ‘한국의 전도지 보급소’가 되었다.
죤슨 박사는 처음부터 기독교 사역자들을 훈련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1968년 그는 비정규적인 과정을 통해서 흥미를 지닌 기독교 사역자 훈련을 시작했다. 그런데 복음을 갖고 대중들에게 나아가고 개척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훈련된 목사를 양성하는 일이 절실했다. 그래서 1972년에 죤슨 박사는 마라나다 신학교를 시작했다. 1975년에 학교 이름을 밥죤스 신학교로 바꾸었다. 죤슨 박사는 선교사로 일하게 된 초기부터 그의 영적 스승이었던, 미국 밥죤스 대학교의 설립자 밥 죤스 박사(Dr. Bob Jones, Sr.)로부터 큰 격려를 받아오던 차였다. 그의 보수적인 입장을 강조하며 밥 죤스 박사를 기념하기 위해 학교 이름을 밥죤스 (기념) 신학교(Bob Jones Memorial Theological Seminary)로 바꾼 것이었다.
1974년에는 죤슨 박사의 장남인 켄 죤슨 (Ken Johnson) 목사가 한국에 들어와 밥죤스 신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당시에 한국은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하에 있었는데, 무인가(정부에 등록하지 않은) 신학교들을 폐쇄하려는 시도들이 있곤 하였다. 그런데 인가를 받는 것(정부에 등록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는데, 만일 인가를 받게 되면 정부가 신학교를 통제하게 되고, 신학교는 세속적인 교육 시스템에 순응해야 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었다. 그밖에도 인가를 받는 데에는 우리의 재력으로는 미치지 못하는 토지와 건물이 요구되었다. 아무튼, 일반 대학에서는 독재에 항의하는 학생 데모가 많이 일어났고, 그 와중에 무인가 학교를 폐쇄하는 일이 유야무야 되었다.
1980년에는 제랄드 죤슨 박사의 사위인 덕 드렐폴 (Doug Threlfall) 목사가 한국에 들어와 밥죤스 신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80년대에는 밥죤스 신학교의 재학생 수가 90여명에 달하였다. 이런 가운데 전두환 대통령이 권좌에 올랐다. 전 두환 대통령은 그의 사촌 이 규호를 문교부 장관에 임명했다. 이 규호는 독일의 급진적 자유주의 학교인 튜빙겐 대학교에서 종교학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그의 계획은 문교부 직원들을 각 무인가 학교들에 보내어 자발적으로 학교를 폐쇄하라고 요구하는 것이었다. 많은 이들이 그것을 단지 형식적인 것으로 생각하며 서명을 하였다. 우리가 그 공무원들을 만났을 때에 우리는 정중하게 서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사도행전 5:29절을 펴 보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하라고 하신 일에 어긋나는 내용의 문서에 서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 공무원은 우리의 서명을 받지 못한 채로 돌아갔다.
그 해 여름에 밥죤스 2세(Dr. Bob Jones, Jr.)가 한국에 와서 문교부 장관을 만나게 되었다. 미국 상원 국방위원회 의장 Stom Thurmond 상원의원의 도움을 받아 그 회동이 이루어졌다. 7월에 밥죤스 2세와 켄 죤슨 목사가 이 장관을 만났다. 많은 이야기를 나눈 후에 이 장관은, 만일 학교 이름을 밥죤스 신학원으로 바꾸면 계속 존속하도록 허용하겠노라고 말했다. 그런데 가을에 문교부로부터 공문이 왔는데, 우리가 자발적으로 학교 문을 닫겠다고 서명을 했으니 학교를 폐쇄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문서에 서명을 한 적이 없었다. 우리는 신학교 대신 신학원이라고 명칭을 바꾸면 계속 해도 된다고 문교부 장관으로부터 허락을 받았음을 알려주었다.
1988년에는 연구원 과정이 신설되었다. 신학원(신학부)을 졸업한 이들이 목회 활동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만한 2년 과정의 연구원 과정을 개설해주길 학교에 요청한 결과였다. 연구원 과정은 봄 학기와 가을 학기의 월요일 오후에 수업을 해오고 있다.
1993년에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또 다시 정부 차원에서 무인가 신학교들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밥죤스 신학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의 Gospel Fellowship Association 선교회의 협조를 받아 한국복음동지선교회를 대한민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등록하기로 했다. 등록 과정에서 "한국복음동지선교회" 대신 "한국복음친선협회"(Korea Gospel Fellowship Association)라는 명칭으로 바꾸게 되었으며, 마침내 1994년 1월 21일자로 문화체육부로부터 "복음 전파"를 목적으로 하는 외국단체등록증(제64호)을 교부받았다. 이로써 밥죤스신학교는 외국단체인 "한국복음친선협회"에서 운영하는 신학교로서, 정리 대상인 무인가 신학교 목록에서 제외되었다.
한국에 도착한 후 그는 한국복음동지선교회(Korea Gospel Fellowship Missions)를 세우고, 전국적으로 전도지 보급과 통신강좌를 시작했다. 한국은 복음과 교육에 목말라 있었다. 전도지 보급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전국에 있는 수많은 목회자들로부터 전도지 요청이 쇄도했다. 모든 전도지는 무료로 보급되었고 단 한 장도 돈을 받고 팔지 않았다. 수백만 장의 전도지가 보급되었고, 수천명이 통신강좌를 수강했다. 한국복음동지선교회는 ‘한국의 전도지 보급소’가 되었다.
죤슨 박사는 처음부터 기독교 사역자들을 훈련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1968년 그는 비정규적인 과정을 통해서 흥미를 지닌 기독교 사역자 훈련을 시작했다. 그런데 복음을 갖고 대중들에게 나아가고 개척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훈련된 목사를 양성하는 일이 절실했다. 그래서 1972년에 죤슨 박사는 마라나다 신학교를 시작했다. 1975년에 학교 이름을 밥죤스 신학교로 바꾸었다. 죤슨 박사는 선교사로 일하게 된 초기부터 그의 영적 스승이었던, 미국 밥죤스 대학교의 설립자 밥 죤스 박사(Dr. Bob Jones, Sr.)로부터 큰 격려를 받아오던 차였다. 그의 보수적인 입장을 강조하며 밥 죤스 박사를 기념하기 위해 학교 이름을 밥죤스 (기념) 신학교(Bob Jones Memorial Theological Seminary)로 바꾼 것이었다.
1974년에는 죤슨 박사의 장남인 켄 죤슨 (Ken Johnson) 목사가 한국에 들어와 밥죤스 신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당시에 한국은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하에 있었는데, 무인가(정부에 등록하지 않은) 신학교들을 폐쇄하려는 시도들이 있곤 하였다. 그런데 인가를 받는 것(정부에 등록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는데, 만일 인가를 받게 되면 정부가 신학교를 통제하게 되고, 신학교는 세속적인 교육 시스템에 순응해야 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었다. 그밖에도 인가를 받는 데에는 우리의 재력으로는 미치지 못하는 토지와 건물이 요구되었다. 아무튼, 일반 대학에서는 독재에 항의하는 학생 데모가 많이 일어났고, 그 와중에 무인가 학교를 폐쇄하는 일이 유야무야 되었다.
1980년에는 제랄드 죤슨 박사의 사위인 덕 드렐폴 (Doug Threlfall) 목사가 한국에 들어와 밥죤스 신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80년대에는 밥죤스 신학교의 재학생 수가 90여명에 달하였다. 이런 가운데 전두환 대통령이 권좌에 올랐다. 전 두환 대통령은 그의 사촌 이 규호를 문교부 장관에 임명했다. 이 규호는 독일의 급진적 자유주의 학교인 튜빙겐 대학교에서 종교학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그의 계획은 문교부 직원들을 각 무인가 학교들에 보내어 자발적으로 학교를 폐쇄하라고 요구하는 것이었다. 많은 이들이 그것을 단지 형식적인 것으로 생각하며 서명을 하였다. 우리가 그 공무원들을 만났을 때에 우리는 정중하게 서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사도행전 5:29절을 펴 보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하라고 하신 일에 어긋나는 내용의 문서에 서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 공무원은 우리의 서명을 받지 못한 채로 돌아갔다.
그 해 여름에 밥죤스 2세(Dr. Bob Jones, Jr.)가 한국에 와서 문교부 장관을 만나게 되었다. 미국 상원 국방위원회 의장 Stom Thurmond 상원의원의 도움을 받아 그 회동이 이루어졌다. 7월에 밥죤스 2세와 켄 죤슨 목사가 이 장관을 만났다. 많은 이야기를 나눈 후에 이 장관은, 만일 학교 이름을 밥죤스 신학원으로 바꾸면 계속 존속하도록 허용하겠노라고 말했다. 그런데 가을에 문교부로부터 공문이 왔는데, 우리가 자발적으로 학교 문을 닫겠다고 서명을 했으니 학교를 폐쇄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문서에 서명을 한 적이 없었다. 우리는 신학교 대신 신학원이라고 명칭을 바꾸면 계속 해도 된다고 문교부 장관으로부터 허락을 받았음을 알려주었다.
1988년에는 연구원 과정이 신설되었다. 신학원(신학부)을 졸업한 이들이 목회 활동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만한 2년 과정의 연구원 과정을 개설해주길 학교에 요청한 결과였다. 연구원 과정은 봄 학기와 가을 학기의 월요일 오후에 수업을 해오고 있다.
1993년에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또 다시 정부 차원에서 무인가 신학교들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밥죤스 신학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의 Gospel Fellowship Association 선교회의 협조를 받아 한국복음동지선교회를 대한민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등록하기로 했다. 등록 과정에서 "한국복음동지선교회" 대신 "한국복음친선협회"(Korea Gospel Fellowship Association)라는 명칭으로 바꾸게 되었으며, 마침내 1994년 1월 21일자로 문화체육부로부터 "복음 전파"를 목적으로 하는 외국단체등록증(제64호)을 교부받았다. 이로써 밥죤스신학교는 외국단체인 "한국복음친선협회"에서 운영하는 신학교로서, 정리 대상인 무인가 신학교 목록에서 제외되었다.